자동차 회사들은 저마다 고유의 작명 규칙을 갖고 있다. 고유명사, 지명, 알파벳 등 이름을 짓는 방식과 규칙은 회사마다, 모델마다 상이하다. 포르쉐의 경우 스포츠카에는 세 자리 숫자를, 세단과 SUV에는 그 성격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고유명사에서 따온 이름을 붙인다. 가령 스포츠카에는 911을 비롯해 718, 928, 356 등의 숫자가 쓰였다.
그런데 포르쉐의 상징과도 같은 911에는 세대 별로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964, 993, 992 등 포르쉐가 세대 별로 신차를 개발할 당시 내부적으로 사용한 이름, 그러니까 코드네임이다.
포르쉐 최초의 양산차인 356을 시작으로 포르쉐는 20세기 내내 세 자리 숫자 차명을 써 왔고, 그 전통은 같은 모델의 세대가 바뀔 때도 이어졌다. 때문에 모든 포르쉐 모델에는 차명 외의 숨겨진 이름, 코드네임이 존재한다.
911부터 993까지 : 공랭 포르쉐의 시대
Porsche Original 911 a.k.a 911 Classic
포르쉐 911은 1964년 처음 출시했다. 첫 모델 356의 후속으로 개발된 911은 더 큰 차체와 더 강력한 공랭식 엔진으로 무장하고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원래 이름은 911이 아닌 901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개발 당시 코드네임이었던 901은 그대로 양산차에 쓰일 예정이었지만, 프랑스 자동차 회사 푸조가 가운데 ‘0’이 들어간 모든 숫자 차명의 상표권을 갖고 있었기에 급하게 바꾼 이름이 바로 911이었다. 이렇게 911은 전설이 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이 계승되고 있다.
1964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자연흡기 911은 별도의 코드네임 없이 "오리지널 911" 또는 "911 클래식" 등으로 불린다. 초기 모델은 클래식한 크롬 범퍼와 동그란 헤드램프 아래에 위치한 방향지시등과 가니시로 쉽게 구분된다. 1974년형부터는 미국 충돌법규에 맞춰 ‘5마일 범퍼’가 장착돼 전면부의 인상도 조금 달라졌다.
1975 Porsche 911 (930)
그런데 클래식 911 중에서도 1975년 처음 출시된 터보 모델에는 '930'이라는 별도의 코드네임이 붙는다. 930은 911 최초로 터보차저를 탑재한 고성능 버전이었는데, 고래 지느러미를 닮은 커다란 리어 스포일러와 넓게 벌어진 와이드 바디로 일반 911과 쉽게 구분된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911 터보의 여러 디자인적 특징은 바로 이 930에서 모두 정립됐다.
1989 Porsche 911 (964)
911이 처음으로 ‘풀체인지 급’ 변화를 겪은 건 1989년이다. 바로 3세대 격인 "964"의 등장부터다. 964는 초대 911의 설계를 계승하되, 많은 부분에서 현대화를 꾀했다. 앞뒤 범퍼가 차체와 일체화된 디자인으로 바뀐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포르쉐의 자료에 따르면 964는 겉보기에 선대 모델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전체 부품 중 약 85%가 새롭게 바뀌었다. 편의사양이 대폭 개선되고 자동변속기, 4륜구동 옵션이 911 최초로 도입된 것이다. 동시에 모터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은 경량 고성능 버전인 ‘RS’, ‘스피드스터’ 같은 스페셜 모델도 만들어지며 911의 외연을 넓혔다.
1993 Porsche 911 (993)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최후의 공랭식 911이 바로 코드네임 "993”이다. 993은 964와 비교하면 앞뒤의 디자인이 훨씬 매끈한 유선형으로 바뀌었다. 특히 수직에 가깝게 서 있던 헤드램프가 기울어져 충돌 안전성과 공기역학 성능을 모두 향상시켰다.
993은 경량 합금으로 만든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911 최초로 적용해 핸들링 성능을 높이는 한편 6속 수동변속기와 4속 자동변속기를 최초로 도입하는 등 퍼포먼스 향상에 집중했다. 또 개선된 AWD 시스템, 대용량 브레이크, 듀얼 머플러 등 다양한 최신 사양을 아낌없이 투입해 공랭식 포르쉐 시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996부터 992까지 : 21세기 포르쉐를 만든 혁신의 주역들
1997 Porsche 911 (996)
1997년 등장한 5세대 911, 코드네임 “996”은 여러 모로 충격적인 차였다. 30년 넘게 이어져 온 공랭식 엔진을 벗어나 911 최초로 수냉식 엔진을 탑재했고, 차체 설계도 완전히 새롭게 변경했다. 게다가 원형을 탈피한 특유의 헤드램프 디자인까지, 기존 911의 원칙을 철저히 깼다. 당연히 혁신적이라는 찬사와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지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996은 21세기에 걸맞는 “현대적인 911”이었다. 수냉식 엔진의 퍼포먼스는 과거보다 크게 향상됐고, 퓨어 모터스포츠 감각의 GT3와 GT2가 최초로 라인업에 추가됐다. 996은 911을 아무나 몰 수 없는 까다로운 스포츠카에서 누구나 꿈꾸는 드림카로 변모시켰고, 재정 위기를 겪던 포르쉐를 부활시킨 주역이 됐다.
2004 Porsche 911 (997)
21세기의 첫 신형 911은 6세대 “997”이었다. 2004년 출시된 997은 과거의 스타일로 회귀해 다시 원형 헤드램프를 채택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 996에 비해 차체 크기를 키우고 밸런스를 향상시켜 안락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한 럭셔리 GT카의 역할까지 겸하게 됐다.
997은 뛰어난 완성도와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며 오늘날 911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특히 2009년 선보인 후기형(Mk.II)에서는 신형 엔진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변속기, PDK를 최초로 탑재했다.
2012 Porsche 911 (991)
997의 후계작인 7세대 “991”은 911의 오리지널리티를 잘 살린 모델이다. 가령 964 시절까지의 타르가 모델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탑재하고, 전통적인 5-실린더 클러스터는 계승하되 최초로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탑재하는 등 전통과 첨단의 조화를 이뤄냈다.
또 한 가지 큰 변화는 후기형에 이르러 카레라, 카레라 S, 카레라 GTS의 엔진이 3.4~3.8L 자연흡기 엔진에서 3.0L 트윈터보 엔진으로 바뀌었다. 당시 자연흡기 포르쉐의 감성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가 컸는데,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퍼포먼스와 효율을 이끌어 내면서도 고유의 감성을 그대로 유지해 호평을 받았다.
2019 Porsche 911 (992)
그리고 마침내 2019년, 현재의 911인 8세대 “992”가 등장한다. 992는 과거의 911과 마찬가지로 모든 라인업의 테일램프가 좌우로 길게 연결된 것이 특징이다. 또 후면에 부착되는 “911” 레터링의 폰트가 클래식 모델과 비슷한 스타일로 바뀌었다. 날렵한 후면부 디자인이 이전 세대 모델들과 구분되는 확연한 특징이다.
현행 911은 퍼포먼스를 위한 첨단 전자제어 시스템과 안락한 여정을 돕는 각종 편의사양 및 운전자 보조 기능, 진보한 안전 장치까지 빠지는 것 하나 없는, 그야말로 911의 “완생”과도 같다. 동시에 최대 650마력의 파워를 내는 성능 역시 더욱 강력해졌다. . 한편으로는 911 최초의 오프로더인 ‘다카르’ 모델이 출시되는 등 지금껏 그래왔듯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이처럼 911은 지난 반세기 넘는 세월동안 쉼없이 진화해 왔다. 아직까지 다음 세대 911의 코드네임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앞으로 몇 년 뒤 등장할 9세대 911은 어떤 코드네임일지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