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6년 최초의 박스터가 등장했을 때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박서 엔진을 차체 중앙에 배치해 극단적으로 낮은 무게 중심과 앞뒤 무게 배분을 갖춘 덕분이었다. 물론 911 대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도 인기에 한 몫 했다. 그 인기는 당시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포르쉐 경영 상태를 단숨에 정상화 시켰을 정도다. 더불어 훗날 포르쉐 최초의 SUV인 카이엔이 탄생하는 발판 역시 이때 만들어진 셈이다.
이런 박스터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박스터 이전에도 포르쉐의 입문형 스포츠카가 있었다는 뜻. 바로 수십 년 동안 명맥을 이어갔던 914, 924, 944, 968이 그 주인공이다. ‘스포츠카 전문 브랜드’였던 포르쉐의 과거는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고 이들이 당시 포르쉐의 ‘대들보’ 역할을 했던 것이다.
포르쉐 엔트리 모델의 시작점, 914 (1969~1976)
입문형 포르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3년 등장한 포르쉐 914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포르쉐와는 많이 다른 형상이다. 동글동글함 대신 각진 모습을 뒤집어쓴 포르쉐다. 폭스바겐과 공동 개발한 배경도 지금의 포르쉐와 사뭇 다른 점이다. 수평대향 4기통 엔진 역시 폭스바겐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포르쉐 마니아들이 914에 좋지 못한 평가를 내린 배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4는 초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멋진 디자인, 경쾌한 주행 성능, 저렴한 가격이 이루는 삼박자가 그 비결이었다. 타르가 톱 방식을 적용한 로드스터인 914는 1톤이 채 나가지 않는 가벼운 무게를 자랑했고 미드십 엔진 구성으로 절묘한 핸들링을 자아냈다. 덕분에 1974년 단종 때 전 세계 판매량은 무려 11만 8,000대에 이르며 포르쉐 엔트리 모델의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다.
파격적인 모습으로 진화한 후속 버전, 924 (1976~1988)
1975년 등장한 924는 오늘날 포르쉐 라인업에 존재하지 않는 프런트 미드십 엔진 방식의 2도어 쿠페 형태로 디자인했다. 엔진은 직렬 4기통을 사용했고 변속기는 4단 또는 5단 수동 방식을 기본으로 채택했다. 여러 부분에서 파격적인 변화를 이룬 것이다.
924 판매량은 이전 914를 넘어섰다. 1988년까지 생산하는 장수 모델로 등극하며 총 판매량은 15만 대나 기록했다. 경량 로드스터에서 벗어나 틈새시장을 공략한 점이 924 성공의 비결이다. 이를 통해 924는 더욱 튼튼한 차체에 고성능 엔진을 얹고 보다 빠르게 달리는 스포츠카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정확히 꿰뚫었다. 아울러 쐐기형 차체에 패스트백 스타일로 완성한 미래적 디자인도 폭발적인 인기에 힘을 보탰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한 포르쉐 중 하나, 944 (1982~1991)
포르쉐 944는 924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따랐다. 플랫폼을 그대로 사용해 쐐기형 패스트백 디자인과 팝업식 헤드램프도 유지했다. 다른 점이라면 944는 전체적인 크기를 키우고 더욱 고급스럽게 꾸몄다는 점이다. 이전 대비 조용해지고 편의장비도 그득 채웠다. 파워트레인도 전설적인 GT인 928의 5리터 V형 8기통 엔진에서 절반을 잘라내 적용했다.
전반적인 개선을 거친 944는 또다시 최고 판매 기록을 갈아 치웠다. 10년이 채 되지 않는 판매기간 동안 16만 3,000여 대를 판매하며 포르쉐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런 성공의 배경에는 최고출력을 끌어올린 944 터보와 그보다 더 강력한 944 터보 S까지 개발하는 등 다양한 파생 버전도 도움을 줬다. 게다가 1985년 부분 변경을 거칠 땐 카브리올레까지 제작했다.
포르쉐 역사상 마지막 프런트 엔진 스포츠카, 968 (1991~1995)
968은 당초 944의 부분 변경으로 개발했다. 그러나 개발 과정에서 부품의 80%를 바꾸는 결정을 내렸고 공식 후속 버전으로 개발 방향을 틀었다. 이에 맞춘 디자인 역시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인다. 팝업식 헤드램프를 버리고 928, 959 같은 상급 버전과 같은 원형 헤드램프를 도입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또한 실내는 더욱 고급스럽게 꾸몄고 GT 성향을 짙게 담아냈다.
엔진은 직렬 4기통 3리터 자연흡기 엔진과 여기에 터보를 얹은 버전을 준비했다. 기본형 최고출력은 240마력을 발휘했고 6단 수동변속기 또는 4단 자동변속기와 짝을 이뤘다. 터보 엔진을 얹은 968 터보 S는 최고출력을 305까지 끌어올렸다. 성능도 당대 슈퍼카에 버금가는 수준인 0-100km/h 4.7초를 기록했다. 아울러 최고 속도 역시 시속 282km까지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판매량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약 1만 3,000대에 그쳤다. 입문형 포르쉐라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워지며 높아진 가격 탓이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968을 향한 포르쉐 마니아들의 관심과 사랑은 뜨겁다. 포르쉐 역사상 마지막 프런트 엔진을 얹은 쿠페라는 사실이 968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포르쉐 역사에는 다양한 입문형 차들이 존재했다. 이들이 강한 개성으로 또렷한 족적을 남겼듯 현행 718 박스터와 카이맨 역시 입문형 포르쉐를 너머 포르쉐 전체 라인업에서 가장 뛰어난 핸들링 성능이라는 개성을 담아낼 수 있었던 배경 역시 과거에서 찾을 수 있을 터다.